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트린 드 메디시스 (문단 편집) === 왕세자비에서 섭정이 되기까지 === 프랑수아 왕세자의 사후 [[앙리 2세]]가 왕세자가 됨에 따라 카트린 또한 왕세자비의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남편 앙리 2세는 이미 19세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라는 애인을 두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실세는 카트린이 아닌 푸아티에가 되었다. 카트린은 수많은 궁정 사람들에게 모욕과 멸시를 받고 남편 앙리와의 동침조차 푸아티에의 발언에 달려있었다. 정작 카트린의 [[6촌]]이기도 했던 디안 드 푸아티에 역시 그다지 높은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며[* 비록 고위 귀족 가문은 아니지만 왕실과 인연이 있었다. 디안의 친조부 아이마르 드 푸아티에의 첫 번째 부인은 루이 11세의 [[사생아]] 딸 마리였고 디안의 외조부 임베르트 드 바타르니는 [[루이 11세]]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푸아티에-발랑티누아 가문은 12세기에 [[푸아티에]] 지역에서 등장하는 유서 깊은 집안이였다. 같은 지역이지만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가문 푸아티에 가문과는 관련이 전혀 없다.] 앙리 2세의 정부가 되어 그의 총애를 바탕으로 벼락출세한 여자였다. 문제는 처음 카트린과 앙리의 결혼에 강력하게 찬성한 건 당시 앙리와 애인도 아니었던 푸아티에 부인이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외국의 궁정으로 시집온 카트린을 편들어 준 인물은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와 시누이인 마르그리트 공주[* 프랑수아 1세의 막내딸로 나중에 [[사보이아 공국|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했다. 마르그리트와의 친분 때문에 카트린은 나중에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로부터 영토를 되찾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밖에 없었다. 프랑수아 1세는 하나뿐인 며느리를 매우 예뻐했고, 카트린이 궁정에서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다. 덕분에 그가 살아있을 때는 카트린도 큰 모욕을 받지는 않았지만, 앙리 2세의 치세가 되고 나서 권력의 중심이 푸아티에 부인이 됨에 따라 온갖 수모를 당했다. 카트린은 이후로도 줄곧 >'''"[[피렌체 공화국|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장사꾼]] 딸내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메디치 가문이 막대한 결혼 지참금을 지불할 경제력이 있다는 점, 교황과 연줄이 있다는 점, 프랑스 왕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선호했다는 점 때문에 강대국 프랑스 왕족과 결혼할 수 있었다.]"''' 와 같은 심한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앙리 2세]] 사후에 왕비로 등극한 카트린의 맏며느리 [[메리 1세(스코틀랜드)|메리 스튜어트]]조차 "[[이탈리아]] 출신 장사꾼의 딸이 왕족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는 논지의 말을 했다고 하니, 그 모욕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 알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이 오랫동안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해도 카트린이 결혼할 당시인 '''[[1533년]]의 귀족 세계에서는 피렌체 공작 작위를 얻은지 얼마 안 된([[1531년]]) 벼락출세 가문이었다'''. 원래 프랑스 왕족들은 암묵적으로 [[귀천상혼]] 법칙에 따라 신분이 낮은 가문의 여자와는 결혼할 수 없었다.] 카트린은 [[모성애]]가 극진한 인물이었지만 어렵게 얻은 아이들조차 앙리 2세가 푸아티에 부인에게 맡기는 바람에, 자식들을 양육하는 건 고사하고 마음대로 볼 수조차 없는 처량한 신세에 놓였다. 게다가 푸아티에 후작부인은 [[1548년]]에 발렌티누아 여공작, [[1553년]]에 에탕프 여공작 작위까지 수여받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앙리 2세]]가 사고로 죽고 카트린이 아들 [[프랑수아 2세]]의 섭정을 맡게 되면서, 그녀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푸아티에를 죽이고 궁정을 피로 물들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카트린의 복수는 단지 푸아티에 후작부인에게서 슈농소 성[* 카트린이 가장 사랑했던 성이었는데, 앙리 2세가 디안을 위해 덜컥 하사하여 카트린에게 굴욕을 주었다.]과 보석 반환, 앙리 2세의 장례식 참여 불허라는 매우 관대한 처분으로 끝났다. 사실 카트린에게 있어서 푸아티에 부인은 단순한 증오의 상대이자 연적이라기보다 애증 비스무리한 불편한 관계였다. 푸아티에 부인은 정부 시절에도 카트린이 아플 때 적극적으로 간호를 해주는 등, 의외로 프랑스 왕비로 존중하면서 보호해주는 쪽이었다. 카트린도 남편을 앗아가고 귀족이라는 이유로 주도권과 실권을 잡은 푸아티에 부인을 좋아할 수 없었으나 일방적으로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런 과거가 있다 해도 당대인들은 카트린을 핍박한 푸아티에 부인이 사형당하고 기즈 가문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푸아티에 부인은 정치에서는 배제되었으나 막대한 재산을 보전하며 조용히 은거했다. 이후 카트린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